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%EC%B2%99%EA%B2%BD%EC%9E%85%EB%B9%84%EB%8F%84_3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000000 △척경입비도(拓境立碑圖)[* ([[http://ko.wikipedia.org/wiki/%EB%8F%99%EB%B6%81_9%EC%84%B1|출처]])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 중인 [[북관유적도첩]](北關遺蹟圖帖)의 일부로, 9성을 개척하고 [[선춘령]]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.] }}} || 고려 [[숙종(고려)|숙종]] 때부터 준비해 [[예종(고려)|예종]] 때까지 진행된 [[고려]]의 '''고토 수복 이념''' 및 '''북방 원정'''이다. [[교과서]]에서는 주로 [[동북 9성]]과 관련된 내용으로 배우고 [[척준경]]의 활약으로도 유명하다. 고려가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갈라전(曷懶甸) 일대[* 동북 9성이 위치한 지역을 일컫는 말.]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고, 이에 완안부 추장 오아속(烏雅束)을 중심으로 모여 여진족들이 여러 차례 고려를 공격했다. 고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9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[[갈라수 전투|결정적 패배]]를 겪은 데다가, 때마침 [[여진]]이 화친을 요청하자 [[윤관]]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성을 포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며 상황이 종료되었다. 이후 여진족은 9성을 발판으로 성장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. 이 전쟁에서 고려는 막대한 군대와 물자를 동원하고도 고토 수복 및 영토 확장은 실패했으나, 강성해지는 여진을 견제한다는 목적은 달성해 고려로 쳐들어온 [[여요전쟁]] 같은 사태를 막는 정치 외교 부분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. 먼 훗날 [[세종(조선)|세종]]의 [[4군 6진]] 개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. ([[http://egloos.zum.com/gil092003/v/565585|진행 과정 참조]]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